【연변축구 르포】큰 별 故최은택—류청

원제:[특별기획: 시간여행] 박태하 이전에 '큰별' 최은택 교수가 있었다 =풋볼리스트 류청기자

 

 

지난해 10 24, 박태하감독이 이끄는 연변 창바이산은 갑급리그(2부리그) 우승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경기장 분위기는 극적이었다. 지난 시즌 꼴지였던 팀이 우승을 차지하는 순간이었다. 조선족 축구팀이 우승을 차지한 것은50년 만이었다. ‘연변인민의 영웅 박태하 THANKYOU’라는 문구가 적힌 대형플래카드가 본부석 맞은편으로 올라갔다.

‘어 저건 누구지?’  지난해 10월 24, 박태하감독이 이끄는 연변 창바이산은 갑급리그(2부리그) 우승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경기장 분위기는 극적이었다. 지난 시즌 꼴지였던 팀이 우승을 차지하는 순간이었다. 조선족 축구팀이 우승을 차지한 것은50년 만이었다. ‘연변인민의 영웅 박태하 THANKYOU’라는 문구가 적힌 대형플래카드가 본부석 맞은편으로 올라갔다.

박태하 감독과 하태균과 같은 연변선수들을 응원하는 플래카드 가운데, 낯선듯 낯익은 플래카드가 보였다. 고 최은택 감독, 아니 최은택교수(이하 최 교수)를 기리는 플래카드였다. 최 교수는 1997년부터 1998년까지연변(당시에는 연변오동)을 이끌었다. 최 교수가 이끄는 연변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당시 1부리그 4위를 차지했다. 이는 여전히 연변이 거둔 최고 성적이다. 최 교수는 8년전인 2005년 2월 5일 별세했다.

 

“최 교수님이 여기 계셨으면 정말 좋았을텐데…” 

연변 서포터 박미화 씨는 박 감독에 열광하면서도 최 교수를 떠올렸다. 연변이 최 교수를 기억하고 기리는 것은 성적 때문이 아니다. 연변은 최 교수를 말 그대로 선생님, 아버지 그리고 선구자로 기억하고 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열악한 상황에 있었던 연변을 일으켰고, 조선족의 자존심을 세운 이가 바로 최 교수다.

우승이 결정된 후 하루 뒤에 벌어진 행사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몸이 좋았지만, 선수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많았다. 알고 보니 최교수와 함께 뛰었던 콩고 민주공화국 출신의 외국인 선수 졸라였다. 연변 팬들은 여전히 졸라를 기억하고있었다. 자신들을 처음으로 뜨겁게 했던 외국인 선수를 잔치 자리에 초대했다. 그만큼 연변 조선족들에게 1997년 당시의 기억은 강렬했다.

연변을 들썩이게 했던 박태하호의 우승 가운데 최 교수가 나온 이유는 미안함 때문이기도 하다. 최 교수는 1997시즌 기적 같은 성적을 거뒀지만, 1998시즌에 8경기만 치르고 경질됐다. 내부 알력과 여러 가지가 복잡하게 얽힌 결과였다. 한 연변팬은 “최 교수님을 그렇게 보낸 아쉬움과 죄송함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다. 팬들사이에서는 ‘박 감독은 절대로 그렇게 보내면 안 된다’는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라고 설명했다.

박 감독과 함께 만난 연변 축구 원로와 지역 인사들도 최 교수를 자주 언급했다.“최 교수님의 뜻을 이어 받은 박 감독이”로 시작하는 축하 인사가 줄을 이었다. 최 교수가 연변을 떠난 지 18년이 지난 후였다. 왜 이들은 최 교수의 이름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미안함과 고마움 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연변과의 우연 같은 만남

연변과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최 교수는 한양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1997년, 1998년을 안식년으로 보냈다. 이때 팔꿈치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을 수소문하다가 중국 쪽에 한방 치료를 잘 하는 곳이 있다는 말에 연변으로 향했다. 당시 최 교수를 안내한 한양대 학생(추명, 이후 이장수 감독 통역으로 일했고, 현재는 상하이 대학 교수)은 조선족이었고, 최 교수는 연변에서 축구계 인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연변 대학은 최 교수에게 1년 동안 겸임교수를 맡아 달라고 요청했고, 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성적이 좋지 않았던 연변오동의 지휘봉을 잡아 달라고 간청했다. 최 교수는 연변대학의 요청은 흔쾌히 수락했지만, 감독 부임을 두고는 고심했다. 1986년 포항 제철아톰스 지휘봉을 놓은 후 10년동안 축구 현장을 떠나 있었다. 게다가 연변의 성적과 환경은 좋지 않았다. 최 교수가 직접 관찰한 연변오동의 상태도 실망스러웠다. 담배와 술을 상시적으로 하는 선수들이 많았다.

최 교수는 지난 2000년 7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정확히 밝혔다. 그는 자신의 조건을 수용하면 지휘봉을 잡겠다고 했다. “팀을 맡기려면 내가 하자는 대로 해야 한다. 2부로 떨어지더라도 성적을 두고 시비하지 말라. 선수 기용이나 관리에 대해서도 일절 간섭하지 말라.” 이 조건이 받아들여지자 최 교수는 1997시즌을 앞두고 연변 오동감독이 된다. 이후 대대적인 개혁을 했다. 아무도 생각하지못한 일이 벌어졌다. 담배와 술을 가까이하던 주축 선수들을 모두 내쫓았다.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선수들을 모두 쫓아냈다. 그러고는 18∼19세의어린 선수 30명을 모아 기초훈련부터 시키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변에서 야단이 났다. 쓸 만한 선수들은 다 내보내고 어린애들을 데리고 무슨 프로축구를 하겠다는 거냐고. 그래서 나한테 맡긴다고 했으니 이런저런 소리 말라고 했다.” 

 

연변은 충격에 빠졌다. 아무리 전권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런 급격한 개혁을 할 것이라 예상한 이는 없었다. 최 교수는 타협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청소년 대표 시절에 최 교수를 만났던 허정무 한국 프로축구연맹 부총재는 최 교수를 이렇게 기억한다. “좋은 분이셨지만, 선수들은 굉장히 무서워했다. 성격이 칼 같은 분이었다. 철학이 분명했고, 고집도 있었다. 아마 한국 축구인 가운데 처음으로 독일 유학을 하신것으로 알고 있다. 선진적인 훈련 방법을 한국에 도입하기도 했다. 무서웠지만, 내게는 잘 해주셨다. 힘들어하는 선수들을 보듬을 줄도 아는 분이었다.”

 

 #연변에 프로축구의 개념을 새운 선구자

“우리에게 프로축구라는 것을 가르쳐줬다” (김룡 길림신문 기자) 

 

개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최 교수는 연변에 프로축구선수라는 개념을 알린 선구자다. 당시 연변오동은 경기 출전여부에 상관없이 20명의선수에게 경기수당을 똑같이 나눠줬다. 최 교수는 경기에 뛰는 선수에게만 수당을 지급했다고 선언하며 경쟁에 불을 댕겼고, 훈련을 게을리하면 팀에서 내쫓겠다고 엄포를 놨다. 선수들이 꾸물거리면 불호령을 내렸다. “그런 식으로 공을 차려면 시골 내려가서 농사나 지어!”

최 교수 아래서 연변은 조금씩 강해졌다. 상대적으로 전력이 좋지 않았던 연변은 수비적인 경기를 해왔는데, 경기 양상도 확실히 바뀌었다. 최교수는 많이 뛰는 축구로 상대팀을 압박했고, 공을 빼앗으면 많은 인원을 공격진으로 일시에 올려 보내는 전술로 재미를 봤다. 한 상대 감독은 최 교수의 연변과 상대하는 기분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한다. “연변과 경기하면 마치 미친개랑 싸움하는 것 같다. 그들은 끊임없이 뛰어다니고 그림자처럼 붙는다. 전혀 당해낼 방법이 없다.”

연변은 강해졌다. 젊은 선수들은 경기를 거듭하면서 경험을 쌓았고, 어떤 상대를 만나도 주눅들지 않았다. 결국1997시즌을 4위로 마무리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열광했다. 축구는 조선족의 자존심이었다. 한족에게 축구만큼은 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이런 아쉬움을 처음으로 날리게 해준 이가 최 교수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최 교수를 명예(영예)시민으로 추대했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생긴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후 2015년 박태하 감독이 두 번째 명예(영예)시민이 됐다.

 #생활비를 선수에게 준 교수님

최 교수는 소리를 질러 연변을 바꾼 게 아니다. 최 교수는 선생님의 마음으로 선수들에게 다가갔고, 선수들은 최 교수의 진심을 느꼈다. 최교수는 월급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연변오동은 월급을 거부하는 최 교수에게 일정액의 생활비를 지급했다. 일반 시민들의 기준으로 보면 큰 돈이었지만, 외국감독이 생활하기에는 작은 돈이었다.최 교수는 이 돈마저 거의 선수들에게 용돈으로 줬다. 한 선수가 지갑을 잃어버리자 자신의 지갑에 있던 돈을 모두 내줬고, 외국인선수에게는 국제통화료를 계산하라며 돈을 줬다. 독일 국적의 다른 팀 감독이 “정말 월급을 받지 않느냐?”라고 묻자 최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

“난 도우러 온 것이지 돈을 위해 온 게 아니다.”

최 교수는 시즌을 치르다가 쓰러진 적이 있다. 스좌장 원정을 떠나기 위해 원정을 떠나다가 공항에서 갑자기 중풍증세를 보인 것이다. 최 교수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좌장 원정을 떠났다. 결국 스좌장에서 선수들의 강권으로 병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최 교수는 경기 당일 다시 그라운드에 나타나 감독석에 앉았다. <길림신문>은 “이 광경을 보고 선수들은 저마다 눈물이 글썽하였다”라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선수들은 감동했다. 당시 노장이었던 황경량은 이렇게 말했다.

“최감독의 모든 행동은 모두 우리를 위한 것이다. 월급도 받지 않으면서 임시로 도와주러 온 사람이 이러할진대 우리가 무슨 이유로 열심히 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최 교수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지난 1998년 는 연변오동과 최 교수의 발자취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했었다. 당시 한 조선족 아이는 누구를 가장 존경하느냐는 제작진의 질문에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최은택 교수님”이라고 답했다. 연길에서 비행기로 4시간 거리에 있는 시안에서 만난 한 시민은 최교수를 아느냐는 질문에  “함부로 감독이라고 부르지 말라. 그분은 우리 모두가 존경하는 교수님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김룡 길림신문 기자는 “당시 연변 사람들이 최 교수를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따랐다. 지금도 그런 분위기가 있다”라고 설명했다.

 #중국에 대서특필된 부고

연변과 아쉽게 이별했지만, 최 교수와 연변의 인연은 그대로 끝나지 않았다. 최 교수는 2000년 길림성의 한 출판사에서 <축구의 예술- 나의 축구관>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후에도 연변과 중국 전역에서 어린 선수들을 발굴하고 교육하는데 도움을 줬다. 여러 도시의 축구학교를 돌아다니면서 강의했고,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연변에 들러 도움을 줬다. 최 교수는 2005년 연변주 체육학교에서 강의했고, 이것이 마지막 연변 방문이 됐다.

2007년 2월 5일, 최 교수는 지병인 페암으로 작고했다. 최 교수의 별세에 중국 <시타닷컴>등 주요 언론이 특집기사를 마련해 최 교수를 추모했다. 연변뿐아니라 중국의 많은 이들이 최 교수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최교수님이 가져다 준 것은 축구뿐이 아닌 인격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최교수님, 천국에 계신 당신을 너무나 뵙고 싶습니다. 영원히 당신같은 진정한 호인(好人)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최 교수가 세상을 뜬지 8년만에 연변은 중국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다. 그 우승을 이끈 이는 한국인 박태하 감독이다. 박 감독과 연변은 ‘2016 슈퍼리그’ 경쟁을 준비 중이다. 오는 4월 2일, 베이징 궈안과의 2016시즌 첫 홈 경기를 치를 때, 최 교수가 연변 지휘봉을 잡았을 때 학생이었던 부모는 박 감독에 열광하는 자신들의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박 감독 전에 최 교수님이 계셨다”고.

 

글=류청 풋볼리스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