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기사⑥] 현장르포Y: ① 박태하는 어떻게 연변의 마음을 얻었나

기사입력 2015.11.05 오후 12:30

 

두만강 북쪽에 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는 가깝고도 먼 곳이다. 한국인들은 조선족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은 오해가 대부분이다. 한국말 혹은 조선말을 쓰는 미묘한 관계의 도시에서 박태하 감독은 작은 기적을 만들었다. 지난 시즌 중국갑급리그(2부 리그) 최하위에 머물렀던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연변 조선족 사회는 박태하가 만든 기적으로 들썩이고 있다. 박 감독은 축구로 조선족의 자존심을 세웠고, 동시에 연변과 한국 사이에 걸쳐 있던 오해를 일부분 지워버렸다. ‘풋볼리스트’는 그 현장을 보기 위해 연변으로 떠났다. <편집자주>

[풋볼리스트=연길(중국)] “연변에 올 때는 솜옷을 입고 오세요”

대전에서 만난 김룡 길림신문 기자는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연변창바이산을 현지에서 취재하겠다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솜옷’이라는 오래된 단어보다 날씨가 춥다는 말에 더 웃음이 났다. 10월 말인데, 아무리 두만강 북쪽이라도 추우면 얼마나 추울까 싶었다.

연길공항의 자동문이 열리는 순간, 한기가 몰려왔다. 한겨울의 추위는 아니었지만 한국과 같은 옷차림으로는 어림없는 아침 기온이었다. 생각해보니 웃음이 나왔다. 연변과 우리의 거리가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했다. 우리는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해의 거의 대부분이 오해인 곳. 멀지만 가깝고, 가까우면서도 먼 곳. 직선 비행거리로는 1시간도 안돼 도착할 수 있는 곳이지만, 돌고 돌아(북한 영공을 통과할 수 없어) 2시간 반에야 겨우 다다를 수 있는 곳이 연변조선족차지주였다.

박태하 감독은 그곳에서 기적을 만들고 있었고, 연변은 그런 박태하에 열광하고 있었다. ‘풋볼리스트’가 가깝고도 먼 그곳으로 간 이유다. 공항에서 만난 박 감독은 솜옷을 입고 있었다.

결정력보다 비싼 것, 마음

경기장 근처에도 가지 않았으나 연변의 축구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호텔 커피숍에서도 박 감독을 알아보고 악수를 요청하는 팬이 있었고, 식당의 조선족 직원은 “보러 간다고 해놓고 한 번도 축구장에 못 가서 죄송하다. 24일 경기에는 가려고 했는데 근무”라며 아쉬움에 고개를 떨궜다. 카운터에서는 박 감독에게 사인을 3개나 요청했다. 지난 시즌 꼴찌였던 연변을 우승 직전까지 몰고 갔으니 당연한 대접이다 싶었다.

성적은 양은냄비와 같다. 당장은 불타오를지라도 조금이라도 삐걱거리면 차가워지는 게 성적에 기댄 열광이다. 그런데 박 감독을 대하는 연변 팬들, 특히 조선족들의 태도는 성적을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연변에서 만난 축구협회 관계자, 구단 직원, 선수 그리고 팬들 모두 박 감독의 지도력과 함께 인성을 칭찬했다. 훈련장에서 만난 팬 박미화 씨는 “너무 자상하시다”라고 했고, 박성웅 단장은 “능력도 능력이지만 사람 됨됨이가 정말 좋다. 항상 겸손하고 성적이 좋아도 자신을 낮춘다”라고 말했다.

“선수들이 박 감독을 부모님처럼 따른다.” 박 단장은 수차례 이렇게 말했다. 감독이 좋은 성적을 거뒀을 때 관용어구처럼 따라다니는 표현이었기에 사실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는데, 막상 현지에서 박 감독의 주위를 배회하니 그 말의 의미가 와 닿았다. 박 감독이 부임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 선수들의 가정환경 조사였다. 박 감독은 지난 9월에 만났을 때 “선수들의 성장환경을 보고 가슴이 찡해졌다”다며 “아이들에게 사랑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라고 말했다.

신파극에 나올법한 이야기가 아니다. 연변은 특별한 환경을 가지고 있다. 1993년만해도 연변의 GDP는 중국 내 30개 민족자치주에서 1위를 차지했으나 1998년에는 5위로 떨어졌다. 중국은 1990년대부터 공업화를 추진했다. 연변은 농업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에 이 흐름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시기부터 돈을 벌기 위해 많은 이들이 한국과 일본 그리고 해외 각지로 나갔다. 이는 한국에 조선족들이 들어왔던 시점과 일치한다.

실제로 연변의 1990년대 생 선수들 가운데 부모님과 함께 유년 시절을 보낸 선수가 거의 없을 정도다. 박 감독은 “20~30%만 부모님과 함께 컸다”라고 했다. 팀의 최연장자인 골키퍼 윤광을 보면 이들의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윤광은 “우리 어릴 때는 돈 없으면 축구를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한국에서 막노동을 20년 가까이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2012년에 귀국하셔서 2014년에 돌아가셨다. 그래도 내가 출세해서 기뻐하셨다”라고 말했다.

박 감독은 상처가 많은 선수들을 보듬었고, 연변 축구와 조선족의 자존심을 세워줬다. 박 감독은 지시하기에 앞서 선수들에게 기본적인 조건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전지훈련을 떠나기 전날 지난 시즌 월급이 6달이나 밀린 것을 알게 된 박 감독은 박성웅 단장을 만나 “여력이 된다면 빨리 해결해달라. 그래야 내가 선수들에게 할 말이 생긴다”라고 말했고, 선수들에게는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할 테니 너희들은 축구만 잘하면 된다”라고 말했다. 구단은 밀린 임금을 3일만에 지급하며 박 감독에게 힘을 실어줬고, 박 감독은 선수들에게 신뢰를 얻었다.


박 감독은 지난 시즌 꼴찌에 머물렀던 선수들을 상대로도 엄한 방법을 쓰지 않았다. 프로로서의 마음가짐을 강조하고, 프로답지 못한 생활에 대해서만 칼을 들었다. 연변의 한 관계자는 “박 감독은 ‘하지마’라는 주문을 거의 하지 않는다. 선수들에게 ‘이렇게 하자’라는 주문만 한다”라고 말했다. 박 감독과 1년 동안 생활한 하태균은 이렇게 증언했다. “감독님의 인성, 선수들을 다독이는 모습에 많은 것을 느꼈다. 선수들이 원래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감독님이 그걸 100% 꺼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변의 자존심을 세운 박태하

“박 감독은 이상하다. 연변 사람들이 싫어하는 한국 사람의 조건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김룡 길림신문 기자)

연변 사람들은 자존심이 세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연변 상황을 제대로 모르고 하는 오해 섞인 이야기에 상처를 많이 받는다. 하태균이 연변 이적을 결심했을 때 주위 선수들이 한 농담 섞인 말은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 “밤에 조심해.” 박 감독과 하태균도 이런 류의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 헛웃음을 지을 정도. 박 감독은 “뭘 몰라서 하는 이야기다. 여기가 더 안전하다. 음식의 질도 매우 높다(연변은 중국에서 식품 안전도가 가장 높은 곳이다)”라며 웃었다.

자존심이 센 연변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러워 하는 게 바로 축구다. 박 감독의 통역이자 홍보팀직원인 리철 씨는 연변에서 만난 첫 날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한국 TV에서 우리 팀을 주제로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다. 고마운 일이지만, 시선 자체가 너무 우리를 불쌍하고 가련한 존재로 만들어서 아쉬움이 있었다. 기사를 쓰려면 우리를 있는 그대로 다뤄달라. (클럽하우스에 주차된 차들을 가리키며) 보시는 그대로다. 우리 선수들도 이 정도의 경제력은 가지고 있다.”

올해로 설립 60주년을 맞은 연변은 지난 1965년 전국축구갑급 대회에서 우승한 뒤 단 하나의 우승컵도 차지하지 못했다. 민족적인 자부심과 당시의 기억을 간직한 노년층은 축구에 대한 관심이 여전하다. 홍련아 씨는 “아무리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있더라도 축구가 하는 날이면 리모콘에 손도 댈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이런 관심 속에서 50년 동안 아쉬움만 삼켰던 것이다. 연변은 1999년 강등된 뒤 지난해까지 1부로 올라서지 못했다. 지난 시즌에는 2부에서도 꼴찌였다. 현지에서 “작년에는 화가 나서 축구를 볼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를 수차례 들었다.

2015년, 박 감독과 축구단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연변은 추운 날씨 때문에 시즌 개막 후 5경기를 원정(올 시즌부터 3경기로 감소)으로 치러왔다. 전력이 좋지 못한데 원정에서 경기를 치르니 지난 9년 동안 개막전 승리가 없었다. 올 시즌 개막전에서 승리를 거두자 구단에서 케이크를 자르며 기념을 했을 정도다. 서포터인 박미화 씨는 “개막전에서는 이기지 못 할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기니까 눈물이 다 났다”라고 말했다. 잔류만해도 다행이라는 분위기 속에서 팀이 21경기 무패를 질주하자 평균관중도 2~3천 명에서 2만 명을 훌쩍 넘겼다.

박 감독을 향한 노년층의 지지는 상상을 초월한다. 1시간 넘게 걸어와 선수단에게 수박과 냉면을 사주라고 천원(약 20만 원)을 주고 갔다는 수박 할머니는 연변에서 이미 유명인이다. 필자는 우승축하연에서 수박 할머니를 직접 만났다. 수박 할머니는 박 감독을 껴안은 뒤 돈(천원)이 담긴 봉투를 건넸다. 구단 직원이 “할머니 이러시면 안 된다”라고 제지하자 할머니는 “네가 뭔데 말리느냐. 이거 내 돈이다”라고 말했고, 이에 주위에 있던 공안들까지 웃음을 터뜨렸다. 연변 체류 기간에 한 맹인 할머니가 생활비를 모아 5천원(약 백만 원)을 구단에 기부하는 것도 목격했다.

노년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민족적인 정서보다는 축구 자체에 관심이 더 많은 젊은이들도 박 감독과 연변에 박수를 보냈다. 서포터 김파 씨는 “다음 시즌에 광저우헝다와 대결을 한다는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울렁거린다”라며 설렘을 표현했다. 초점은 조금씩 달라도 연변의 선전을 보는 연변 사람들의 정서의 뿌리는 같다고 볼 수 있다. 거의 유일하게 단일민족으로 꾸린 팀(주전 11명 가운데 10명이 조선족)의 자그마한 선수들이 덩치가 커다란 한족과 다른 민족 팀들을 눌렀다는 것이다. 그것도 창단 60년, 첫 우승 50년을 기념하는 해에 이런 경사가 생겼다.

“연변 선수들이 신체적으로 키와 덩치가 작아서 몸싸움에서 밀리는 것을 보면서 컸다. 당시에는 (연변에) 신체조건이 좋은 선수들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을 많이 했다. 속도에서는 우월한데 몸싸움에서 자꾸 밀리니까 속상했다. 선수들이 야속하기도 했다. 우리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전술이 있어야 한다고 느꼈는데, 박 감독님이 와서 이런 부분을 완벽하게 해결해줬다. 너무 감동적이다.” (홍련아)

눈물 흘리는 기자, 큰절하는 기자

연변은 24일 29라운드 경기에서 후난시앙타오를 이기면 다른 팀 경기결과와 상관없이 갑급리그 우승을 결정지을 수 있었다. 경기 전부터 연변의 분위기는 뜨거웠다. 22일과 23일 낮에 벌어진 훈련을 찾은 팬들이 백 명 이상이었다. 조선족뿐 아니라 한족 서포터도 많았다. 각자의 방식으로 연변의 우승을 기원했다. 한족 서포터 중에는 머리를 모두 깎고 뒤통수에 YB를 새긴 팬도 있었다. 필자에게 “박 감독이 남느냐?”고 묻는 팬도 있었다. 연변이 이 지역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짐작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경기 당일은 좀 더 극적이었다. 우승도 결정되지 않았고, 박 감독의 잔류도 결정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본부석 맞은 편에 앉아 있던 한족 서포터는 경기 시작 직전에 큰 플래카드를 들어 올렸다. ‘박태하 연변 인민의 영웅. THANK YOU’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었다. 경기장 측면에 앉은 조선족 서포터들은 ‘박태하. 슈퍼리그도 우리 함께하자’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그리고 연변 팬들은 예상하지 못한 응원가를 불렀다. 아리랑이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이 연길인민경기장에 울려 퍼지자 가슴이 조금 먹먹해졌다. 박 감독과 선수들이 매번 느꼈을 먹먹함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경기는 연변의 승리였다. 하태균이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우승에 마침표를 찍었다. 하태균은 경기 전까지 득점 1위에 1골 차로 뒤지고 있었는데, 첫 골을 넣은 뒤 페널티킥을 얻자 경기장 치안을 맡고 있던 공안들이 “(하)태균이가 차라”고 소리를 질렀다. 다리가 불편한 할머니는 며느리의 걱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서 경기를 지켜봤고, 차가운 콘크리트 계단에 앉아 경기를 지켜보는 이들도 많았다. 담배를 꼬나 물고 초조하게 경기를 지켜보던 한 할아버지는 종료휘슬이 울리자 반색하며 일어나 옆에 앉은 이들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우승을 기념하는 축포가 터졌고, 경기장 하늘에는 노을이 걸렀다.

연변 팬들의 불안감은 아직 다 사라지지 않았다. 모두가 기뻐하는 가운데 박 감독만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물놀이패가 경기장을 빙빙 돌며 축하 공연을 하는 동안에도 박 감독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기자회견을 하러 들어오는 박 감독을 향해 사진기자들이 몰려 들었다. 그런데 한 기자가 카메라를 땅에 놓더니 박 감독에게 큰절을 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지만, 경기가 끝난 후 열린 공식기자회견 분위기는 침착했다. 박 감독이 여전히 웃음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 거취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인터뷰가 거의 끝날 때쯤에 박 감독이 천천히 입을 열자 기자회견장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정적을 깬 이는 박 감독이었다. “사실 시즌 중에 많은 팀에서 제의가 있었습니다. 고민도 했습니다. 결정은 했는데 시즌이 끝나지 않아 말씀 드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연변을 떠날 수 없습니다.” 박 감독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수가 터졌다. 박 감독의 말을 알아 들은 기자들이 박수를 친 것이다. 통역이 박 감독의 말을 중국어로 옮기자 다시 한 번 박수가 나왔다. 옆에 앉아 있던 박성웅 단장이 박 감독과 2년 계약을 맺었다고 설명하자 또 한 번 박수가 나왔다.

기자회견장에 있던 한 기자는 눈물을 흘렸다. 나이가 지긋한 남자 기자는 박 감독의 잔류선언에 눈시울을 붉히더니 이내 뒤로 나가서 눈물을 닦았다. 박 감독은 1999년 강등된 이후로 단 한 번도 슈퍼리그(1부리그)에 오르지 못한 연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연변에서 자란 팬과 기자들은 연변의 우승이 어떤 의미인지 가슴으로 느끼고 있었다. 한 기자의 눈물은 박 감독이 연변에서 보낸 1년을 보여주는 상징물 같은 것이었다.

“이들은 항상 조선족이 한족보다 우월하다고 하지만, 실생활을 보면 한족들에게 무시당하는 일이 많다. 말하지 못하는 설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축구로 한족팀을 모두 꺾었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